학교소개

숭실史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민족 최초의 대학

숭실의 최초

‘진리와 봉사’를 이념으로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실력 있는 인재의 양성

숭실대학교가 고등교육의 불모지나 진배없는 이 땅에 ‘진리와 봉사’ 를 이념으로 내걸고, 고등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2023년 10월 10일을 기하여 126주년이 됐다. 숭실대학교는 그 긴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시대가 요구하는 고유한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 하면서 ‘진리와 봉사’의 사명을 다해왔다.

기계창에서 목공 작업을 하고 있는 학생

1895년의 한문학교

민족 최초의 대학 숭실이 창설되던 당시 우리나라는 구한말 대한제국의 시대로써 봉건적인 색채와 전근대적인 사유의 틀을 말끔히 벗어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 같은 상황에 처하여 이에 숭실대학교는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봉건적인 구습으로부터 벗어나게하여 나라를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학교의 고유한 사명으로 삼게 되었다.

숭실대학교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전도활동을 벌이고, 음악, 체육 및 문예활동에 참가하여 국민계도에 앞장 선 것은 그 같은 시대적 상황에 대응한 활동이었다. 1910년 일제의 강앞에 굴복하여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이후 식민지 지배 하의 숭실대학교는 국권의 회복 즉, 나라의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05인 사건을 위시하여 1910년대 국내 최대비밀결사체인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고, 3.1독립운동, 광주학생 운동에 참여하여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1938년에는 그 극단적인 행동의 표현으로써 폐교라는 단장의 아픔을 스스로 결단하기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숭실대학교는 계몽활동이나 독립투쟁에서 보여준 과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 것은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실력있는 인재의 양성 이다. 그 같은 과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 학교는 이사들과 동문들 그리고 교직원과 학생이 혼연 일체가 되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다. 숭실대학교가 오늘의 모습으로 성장하기까지 폐교와 같은 극단적인 사태를 포함하여 몇 개의 중대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기계창에서 자조근로학생들의 모습

숭실의 지조

‘숭실(崇實)’에서의 ‘숭’은 ‘숭상(崇尙)한다'는 뜻이며 ‘실’은 ‘진실’의 실이요, ‘성실’의 실이다.

개교 34주년 및 베어드 박사

숭실대학교의 효시는 ‘숭실학당’에서 찾아야 한다. 당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배위량(W. M. Baird, 裵緯良)박사가 1897년 10 월 10일 평양에서 뜻 있는 젊은이들을 그의 사랑방에 모아 중학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그 이름을 숭실학당이라 부른데서 비롯된 것이다. ‘숭실(崇實)’에서의 ‘숭’은 ‘숭상(崇尙)’한다는 뜻이며 ‘실’은 ‘진실’의 실이요, ‘성실’의 실이다.

진실이란 진리의 탐구를 말하며 성실이란 도덕적인 인격의 수련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숭실이란, 이론적인 진리의 탐구와 고결한 인격의 수련을 동시에 수행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이며, 숭실대학교의 교육이념인 ‘진리와 봉사’의 정신에 직결한다고 볼 수 있다.

중학과정의 숭실학당은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3년후인 1900년에는 수업연한 5년 과정의 정식 중학교로 발돋움하고, 1904년에는 첫 졸업생 세 명을 배출하게 된다. 그러나 숭실은 숭실중학 졸업생을 대상으로 대학교육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1906년 9월 15 일 대학부를 설치하며 한국최초로 대학교육을 시작하였고, 1908년에는 대한제국 학부(學部) 로부터 ‘숭실대학’을 인가받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 당시 숭실대학의 운영은 한국에 파견된 선교부 전체의 합의에 의한 연합교육 기관의 성격을 띠었으며 연합기독교대학 (Union Christian College)이라는 명칭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1912년 숭실대학은 일본 총독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았으나, 1925년 일제의 사립대학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공포 된 ‘사립학교규칙’에따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춰 재인가 받을 것을 강요당했다.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강화해 온 일본은 드디어 신사참배라는 야만적인 미신행위를 강요하는 추태를 드러내게 되었고 그에 대한 숭실대학의 태도는 매우 명쾌하고도 단호한 것이었다. 그것은 설사 학교의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신사참배 강요에는 단호히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105인 사건을 위시하여 국민회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고, 3.1독립운동, 광주학생운동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숭실의 선각자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맞서 단장의 아픔을 스스로 결단하기에 이른다.

동아일보 폐교 관련 기사

1938년 3월 4일 숭실대학은 마지막 졸업식을 끝으로 대학과정을 시작한 지 39년만에 폐교라는 역사적인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민족에 대한 성실성의 표현으로서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는 숭실정신의 발로였다.

숭실의 부활

1954년 4월15일 설립인가를 얻어 숭실대학의 재건

개교식

민족이 염원하던 8.15 해방을 맞아 숭실의 가족들은 숭실부활의 감격을 꿈꾸었으나 남북분단으로 인해 공산치하를 피해 남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의 하늘 아래서 숭실대학 재건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으나 뜻하지 않은 6.25동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숭실대학 재건운동이 본격적으로시작된 것은 휴전으로 서울 환도가 이루어진 이후의 일이었다.

사학과 학생 일동

1953년 12월 서울 영락교회에서 숭실대학 재건 기성회가 조직되고 거기에서 숭실대학 재단 이사회를 결성하여 설립인가를 문교부에서 제출하였다.
드디어 1954년 4월 15일 설립인가를 얻어 숭실대학의 재건을 보게 되었으니 스스로는 폐교를 결의한지 만 16년만의 쾌거였으며 그 감격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초대 학장으로 한경직 목사가 취임하였으며 영락교회의 임시건물을 임시교사로 사용하였 다. 처음 설치된 학과는 영어영문학과,사학과, 철학과, 법학과, 경제학과 등이었으며, 뒤이어 경영학과,무역학과, 사회사업학과 등이 설치되었다. 재건 후 임시교사로 사용하던 영락교회 부속건물에서 현재의 상도동 캠퍼스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된 것은 19 57년 6월의 일이었다.

한국기독교박물관 개관

기계실습

재건 초기에는 재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어려움이 많았고 발전의 속도도 더딘편이었으나 숭실대학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서 발전의 거보를 내딛는 계기를 이룬 것은 고 김형남 장로를 이사장으로 맞이하면서 부터였다. 그의 헌신적이고도 눈부신 활동은 숭실대학을 오늘의 숭실대학교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찬사를 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재건된 숭실대학이 대전대학을 맞아들여 숭전대학교라는 종합대학으로 발전적 통합을 이룩한 사실이다.

OMR카드천공작업

설립 목적이 같은 숭실대학과 대전대학은 각기 개별적인 학교 운용의 방식에서 벗어나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하나의
종합대학교로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국내외의 선의의 충고를받아들여서 두 대학의 이사회는 드디어 연합 기
독교 고등교육재단을 구성하여 그 승인을 문교부에서 신청하였다. 1971년 1월 문교부로부터 두 대학의 통합인가를 받은 두 대학은 교명을 숭전대학교로 변경하여 하나의 대학으로서 출범을 시작하였다. 재건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숭실대학은 점차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해 1967년에는 한국기독교박물관을 개관했고 1969년에는 컴퓨터를 도입하여 국내 대학 최초로 컴퓨터교육을 시작하였다.

숭실의 도약

교명 숭전을 원래의 교명인 숭실로 환원

재건된 숭실대학이 발전의 궤도에 들어서서 웅비의 기틀을 다지게 된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숭실대학이 대전대학을 맞아들여 숭전대학교라는 종합대학으로 발전적 통합을 이룩한 사실이다. 1971년 1월, 설립이념이 같은 숭실대학과 대전대학은 교명을 숭전(崇田)대학교로 바꾸고 하나의 대학으로서 출범하였다.

1971년 12월, 숭전대학교는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문리과대학, 법경대학, 공과대학 등 3개 대학에 이부대학을 합쳐 21개 학과를 설치하였고, 1972년 1월에는 9개 학과의 대학원 석사 과정을 신설하였으며 1974년에는 연이어 박사과정을 개설하여 명실상부한 현재의 숭실대 학교로 발돋움하게 된다. 초대 숭전대학교 총장에는 고 김형남 박사가, 이사장에는 타요한(J ohn E. Talmage)박사가 취임하였다.

종합대학승격축하회

김형남 총장 취임

그러나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발전의 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체와 분열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두 대학이 결합하여 숭전대학교로 통합, 발전을 거듭한 것은 사실이나 이제 적당한 선에서 분리하여 두개의 대학으로 독립운영하 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 아래, 1982년 10월 재단이사회에서 두 대학의 분리를 정식으로 결의하여 문교부에 승인 요청을 하였으며 1983년 3월 새학기를 맞아 정식으로 분리 운용하게 된다.

1987년 개교 90주년을 맞아 대전대학과 통합하여 사용해 오던 교명 숭전을 원래의 교명인 숭실로 환원하였고, 재단의 명칭도 학교법인 연합 기독교 교육재단에서 학교법인 숭실대학 교로 변경하여 숭실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교명환원 선포 기념 예배

숭실의 비상

훌륭한 역사와 전통의 토대 위에 민족의 대학으로 성장해 온 숭실대학교

숭실대학교는 2014년 부터 숭실통일리더십연수원을 통해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리더십교육을 운영하고 있으며, 숭실대학교는 1983년 국내 최초로 중소기업대학원,1987년 정보과학대학원, 2005년 IT대학, 2010년에는 금융학부 신설에 이르는 등 시대를 앞서가는 교육으로 실용학풍의 전통을 드높여왔다.

2021년 현재 인문대학 11개 학과(부), 자연과학대학 5개 학과(부), 법과대학 2개 학과, 사회과학대학 6개 학과(부), 경제통상대학 4개 학과, 경영대학 4개 학과(부), 공과대학 6개 학과(부), IT대학 7개 학과(부), 융합특성화자유전공학부, 베어드교양대학, 독립학부 3개 학부 등 9개 단과대학에 총 48개 학과(부)를 운영하고 있다.

1997년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 최초의 대학 숭실대학교는, 2021년 개교 124주년을 맞아 더 큰 미래를 위한 변화와 발전을 가속화하고 있다. 2005년 형남공학관, 2007년 조만식기념관·웨스트민스터홀, 2010년 최첨단 기숙사인 레지던스홀, 2012년 학생회관, 2014년 숭실통일리더십연수원을 완공하였고, 2019년 숭덕경상관을 신축하여 학생들에게 혁신적인 교육환경을 제공함과 동시에 다양한 캠퍼스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중앙도서관 전경

중소기업대학원 개원

숭실대 전경

중소기업대학원

인재양성을 위한 정책으로는 ‘베어드입학우수장학제도’의 도입으로 숭실을 선택한 인재들에게 4년 전액장학금, 학업지원비 및 기숙사 제공뿐만 아니라 세계최우수대학 박사과정 진학 시 학비보조에 이르기까지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훌륭한 역사와 전통의 토대 위에 민족의 대학으로 성장해 온 숭실대학교, 끊임없이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되는무한 경쟁의 글로벌 시대에 통일을 준비하는 창의적 리더를 양성하는 숭실대학교는 튼튼하게 다져온 핵심역량을 추진력으로 최초의 대학에서 최고의 대학으로 도약하고 있다.

숭덕경상관

Ori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