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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소개

유래/전설

100%

구이면

본래 전주군(103년 10.1일 이후는 완주군)지역으로 구이면이라하여 상보, 하보, 평촌, 소용, 상철, 하철, 주리, 태실, 박성, 화원, 난산, 봉성, 신원, 신흥, 효간, 광곡, 구암, 총명, 칠암, 와동, 덕천, 지동, 두방, 두현,하학, 상학, 유광, 원리, 신전, 항가, 구복, 무지, 망월,반월, 마음, 성덕, 교동, 계곡, 염암, 대덕, 장파, 안덕, 백여, 호동, 용동, 신정, 상용, 하용의 48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난전면의 총명리 석구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평촌 광곡 백여의 9개 리로 개편, 관할하다가 1988년 1월1일 석구리, 원당리, 중인리, 용복리의 4개 리가 전주시에 편입됨. 동쪽은 상관면과 임실군 신덕면, 임실군 운암면, 서쪽은 정읍시 산외면, 김제시 금산면 금구면, 북쪽은 전주시에 닿음.

평촌리(平村里)

본래 전주군 (1935. 10. 1일 이후는 완주군) 구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평촌리 상보리 하보리 소용리 상척리 하척리 주리리 태실리 박석동 일부를 병합하여 평촌리라 하여 구이면에 편입됨.
원평촌(元平村. 坪村)

부분명-낡은터 평촌은 평평한 들에 위치했기에 ‘들말→평촌(坪村)’. 낡은 터는 평촌 남쪽에 있는 마을로 본래의 마을 터 였으나 차차 인가가 줄었다.

상하보(上下普)

부분명-상보, 하보 상하보는 상보와 하보를 합친 분리명. ‘보’는 근처에 보광사(普光寺)가 있어 상보광 하보광이라 한 명칭을 분리명으로 다시 약한 이름.

소용(巢龍. 소룡터. 巢龍里)

부분명-상척(上尺. 웃자골) ‘소용’은 ‘소룡’이 본 이름. 뒷산이 용이 깃들어 있는 형국이라 한다. ‘웃자골’은 ‘자골’을 위 아래로 나눈 이름인데 ‘자골’은 이 마을 뒤에 재가 있어 ‘재골→자골’이라 한다.

하척(下尺. 아랫자골)

부분명-주리실(周利實) 주리실은 아랫자골 남쪽에 있는 마을임. ‘실’은 ‘골(谷)’과 같은 뜻.

태실(胎室)

조선조 예종의 태실이 있었다고 한다.

광곡리(光谷里)

본래 전주군(1935. 10. 1일 이후는 완주군) 구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광곡리 화원리 난산리 봉성리 신월리 신흥리 효간리와 박성리 구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광곡리라 하여 구이면에 편입함.
원광곡(元光谷. 廣谷. 너브실)

부분명-효간(孝澗) 광곡은 군처에서 비교적 넓은 골짜기 이므로 생긴 명칭. 효간은 신흥 남쪽에 있는 마을.

난산(卵山)

부분명-신흥(新興. 뱅이), 덕암(德岩) 난산은 뒷산 이름이 난산인데 뒷산에 비봉포란혈이 있다고 한다. 신흥은 난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명명된 이름이다. 덕암에는 ‘소년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으니 ‘큰바우→덕암(德岩)’으로 본다. ‘덕 (德)’은 크다는 말의 새김으로도 많이 쓰였다.

화원(花元里. 花園. 항골)

부분명-박성동(朴姓洞. 朴成洞) 박성동은 박씨촌이었다고 한다.

신원(新元. 新園)

화원리 위에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신원(新元)이라 전에는 난산 동쪽에 봉성(鳳成)이라는 마을이 있었 으나 광곡저수지로 수몰되었다.

덕천리(德川里)

본래 전주군 구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덕천리 총명리 칠암리 와동리 지동리 구암리와 난전면 석구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덕천리라하여 구이면에 편입함.
원덕천(元德川. 안터. 텃내)

원덕천은 법정 이명과 구별하기 위하여 본래의 덕천이라는 뜻에서 ‘원(元)’을 덧붙인 것이고, ‘덕’ 은 ‘터’의 고어이니 텃내의 한자 표기가 덕천이다.

구암(九岩. 龜岩)

마을 뒷산 아래에 거북과 같은 바위가 있어 생긴 이름.

지등(芝登)

마을이 구릉 지대에 형성되었고 많은 등성이므로 생긴 명칭이라 함.

와동(瓦洞. 지새울)

기와집이 많아서 생긴 이름. ‘지새’는 기와. ‘울’은 ‘골’의 변한 말.

칠암(七岩. 칠애미)

마을 주위에 큰 바위 일곱 개가 있어 이루어진 명칭.

청명(淸明. 靑明. 聽明. 동조골)

부분명-내청명.외청명 내청명 외청명은 청명을 위치에 따라 구분한 명칭이고, 동조골은 칠암 서북쪽에 있는 마을.

두현리(斗峴里)

본래 전주군91935. 10. 1일 이후는 완주군) 구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두현리 두방리 하학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두현리라 하여 구이면에 편입함.
원두현(元斗峴. 말재. 말고개. 마루개)

이 마을 뒷산의 재 이름이 말재고 말재의 한자 표기가 두현(斗峴)이다. ‘말’은 위 마루 크다는 말이다.

두방(斗方里)

마을 뒷산에 예전의 말과 같은 네모진 명당 자리가 있다고 한다.

대천(大川里. 바람재)

큰 냇가이므로 ‘큰내→대천(大川)’. 바람재는 바라보이는 재 뜻.

원기리(元基里)

본래 전주군 구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원기리 유광리와 상학리 하학리 두현리 신전리 항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원기리라 하여 구이면에 편입됨.
상학(上鶴. 원학내)

상학(上鶴. 원학내) 본 이름 ‘학내(鶴川)’를 위치에 따라 상 하로 구분한 명칭. 학내는 그 곳 황학하전혈, 또는 쌍학혈이 있다는 풍수설에 따라 생긴 이름이라 한다.

하학(下鶴. 아래학내)

‘상학’ 참조 이 밖에 전에는 각호리, 방성정리, 유광리(柳光里), 치소(治所)등의 마을에도 인가가 있었는데 모두 구이 저수지로 수몰되었다.

항가리(亢佳里)

본래 전주군 구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항가리 구복리 두지리 반월리 마음리와 신전리 두암리 상학리 하학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항가리라 하여 구이면에 편입함.
원항가(元亢佳. 항가매)

마을 뒷산 이름이 항가매다. ‘매’는 ‘뫼→매’로 산이라는 말.

신전(新田. 薪田)

부분명-고삿밭. 승방(僧房) 신전에는 섶밭이 있어 생긴 이름. 고삿밭은 고샅에 있는 밭의 뜻. 승방은 고삿밭 서쪽에 있는데 전에 중 이 살았다고 함. 잿배기는 고삿밭 동쪽에 있는 마을로 재 죽 언덕진 곳.

무지(武池里. 무지울. 무줄)

부분명-안무지울(내무지=內武池) ‘무지울’의 ‘울’은 ‘골’의 변한 말이니 ‘무지골’이 본래의 이름이다.

신기(新基. 새터)

항가 서남쪽에 있는 새로 된 마을.

반월(半月里)

뒷산에 운중반월혈이 있다고 한다.

마음(馬音)

뒷산 재 이름이 마음재고, 남쪽에는 말봉이 있다.

망산(望山. 望月)

부분명-시라우, 돔바우(斗岩) 망산은 뒷산이 옥토망월형이라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하고, 모악산을 바라보고 있어 망산이라고도 한 다. 시라우는 돔바우 남쪽에 있는 마을로 그 동쪽에 시루봉이 있어 서로 관련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돔 바우는 망산 남쪽에 있는 마을. 이 밖에 전에는 승방 서쪽에 있는 구복(九伏)마을에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계곡리(桂谷里)

본래 전주군 구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계곡리 성덕리 교동리 염암리 대덕리 두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계곡리라 함.
원계곡(元桂谷. 溪谷 .鷄谷. 계실)

계곡에는 전에 닥나무가 많아서 ‘닥나무골→鷄谷’이었다 하고, 일설에는 뒷산이 닭형국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대덕(大德. 큰터)

대덕의 ‘덕’은 ‘터’의 옛말이므로 ‘큰터’가 바로 ‘대덕’이다.

염암(鹽岩. 소금바우)

부분명-밧소금바우, 안소금바우 앞 산에 소금바우라는 바위가 있었다고 하고, 앞 산 이름이 소금산 또는 속음산 또는 속금산이었으니 속금산 바위의 뜻에서 온 말이라고도 한다.

신기(新基)

계곡 가운데에 새로 생긴 마을.

교동(橋洞. 다리골)

‘다리’라는 말은 들의 고어이니 ‘들골’의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동성(東成)

부분명-동월(東月),성덕(成德) 동월은 동성 서쪽에 있는 마을이고, 성덕은 동성 서쪽에 있는 마을.

백여리(白如里)

본래 전주군 구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백여리 호동리 용동리 선정리 상룡리 하룡리를 병합하여 백여리라 함.
원백여(元白如. 희여리)

부분명-호동(虎洞) 백여의 본 이름은 희여티로 희여티 고개의 밑에 있는 마을이니 고개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 호동은 정자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그 곳에는 복호혈(伏虎穴)이 있다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신정(新亭. 新丁)

정자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니 새 정자리라는 뜻에서 신정이라 하였을 것이다.

상용(上用. 上龍. 놋점)

부분명-새터 상용에는 앞산에 비룡상천혈이 있어 생긴 이름이라 하고, 놋점 마을에는 놋점이 있었다. 새터는 상용 동남쪽에 새로된 마을.

대모(大毛. 큰못지)

대모는 본 이름 ‘못지’를 대 소로 나눈 이름.

정자(亭子里)

부분명-소모(小毛. 작은못지), 덕동 정자리는 마을 앞에 큰 정자나무가 있었다. 덕골의 ‘덕’은 ‘터’또는 ‘언덕’의 옛말이니 텃골이나 언덕박이의 뜻에서 이루어진 이름일 것이다.

안덕리(安德里)

본래 전주군 구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안덕리와 장선리를 병합하고 안덕리라 하여 구이면에 편입함.
원안덕(元安德. 큰안덕. 안터)

부분명-구안덕(舊安德), 배재울 안덕의 덕은 터의 고어이니 안터라는 뜻이다. 마을이 깊숙한 안쪽에 자리잡아 일컫던 이름. 구안덕은 안덕보다 먼저 생긴 마을, 배재울은 배재 밑에 있는 마을인데 지금은 인가가 없다.

신기(新基. 새터)

부분명-양생동(養生洞), 용소(龍沼), 매산리 신기의 장파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 양생동은 우름티 서쪽에 있는 마을. 매산리는 새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인가가 없다. 산 이름이 매산이다.

장파(長坡. 長婆)

이 마을 옆에 장파사(長婆寺)가 있었다 한다.

미치(美峙. 미재)

부분명-내운암, 신암, 탑선

구암마을

현재 100여세대 2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구암마을은 후조선 중종 17년 서기1522년에 수원김씨, 동래정씨, 연안이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이 지역은 고덕산 줄기를 따라 약500리를 뻗어 내려와 옆에는 아버지산 경각산, 앞에는 어머니산 모악산이 있는 장엄한 대명당(大明堂)이다.
명당인 이곳에는 조선조 8대 임금인 예종대왕의 태를 묻었다는 태실(胎室)이 있었고 태실 아래 큰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 웅덩이에 살던 큰 거북이가 알을 낳던중 하나가 이곳에 떨어져 거북바위가 되었다고 전한다.
거북바위는 그 둘레가 19미터에 높이 4미터에 이르고 아래로 9개의 작은 거북형상이 있다. 거북바위 등에는 줄이 쳐져있어 거북이의 등을 연상시키고 등에 있는 버선뽄 모양은 장수가 쉬어간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 전한다.
무병장수를 상징하기도 하는 거북이의 모양을 한 바위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해 이곳에 귀한 아들을 팔아 무병장수를 기원한 이들도 있어 지금도 바위에 그 이름과 아들을 팔았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 신령한 거북형상을 따라 현재의 구암마을은 귀동(龜洞)골 귀암(龜岩)으로 불렸으며 당시 행청 장소는 이 마을 1039번지에 위치하고 창집은 973번지에 있었다 한다.
그러던 중 일제치하에 공출을 목적으로 운암도로가 신설되면서 항가리 구면청으로 지금의 면사무소를 이전했다고 전한다.
귀동골 구암은 약 370년 유지하고 내려오던 중 고종 말기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국권이 왜정으로 바뀌면서 거북귀(龜)자가 쓰기나 부르기가 어려워 아홉구(九)로 고쳐쓰기 시작하면서 귀동(龜洞)골을 구이(九耳)면으로 귀암(龜岩)을 구암(九岩)으로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
구암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덕천리에 속하게 됐고 덕천리에는 구암을 비롯 원덕천(元德川), 지등(芝登), 와동(瓦洞), 칠암(七岩), 청명(淸明)등의 마을이 있다.

와동마을

각 마을도 그 명칭의 유래가 있어 마을의 특색을 나타내며 주민들을 하나도 어우르는 구심체가 되고 있다.
그 중 와동(瓦洞)은 모악산의 가슴에 와닿는 마을로 마을에 기와집이 많아 기와와(瓦)자를 써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1920년경 물레방앗간이 있었고 바로 옆에는 육당 최남선이 심춘순례를 하면서 들른 집이 있으니 바로 심농 조기석의 집이다.
조기석은 덕진연못에 있는 취향정 편액을 쓴 서화가다. 최남선은 모악산 등정을 위해 전주 꽃밭정이를 거쳐 문정리를 지나 와동마을에 머물렀다 전한다.
이밖에도 지등(芝登)마을은 마을이 구릉지대에 형성돼 있고 많은 등성이가 있어 생긴 명칭이며 칠암(七岩)마을은 마을 주위에 큰바위 일곱개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어머니 품속같아 모악산

예부터 엄뫼, 큰뫼로 불려져온 모악산은 정상아래 자리잡고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 같아 모악산이라 불리운다. 사방팔방으로 뻗어내린 산출기가 마치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같은 모악산은 호남평야의 젖줄인 동진강과 만경강 사이에 우뚝솟아 호남평야의 전망대라 불리우기도 한다.
모악산은 완주군 구이면과 전주시 삼천동 그리고 김제시 금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구이면 쪽에서 산행을 하자면 학천(鶴川)마을을 거치게 된다.
학천마을은 모악산 중턱 벼락바위에서 학 한 마리가 주위를 살피던 중 벼락바위 남쪽에 있는 매바위를 보고 깜짝놀라 급히 도망치다가 이마을 냇가에 이르러 쉬려고 멈췄을 때 진짜매가 뒤쫒았으나 너무지쳐 날지 못하고 냇가에서 죽었는데 그 후 마을 모습이 학과 같아 학천이라 불렸다 한다.
학천마을을 지나 모악산에 오르다 보면 어머니의 품속같은 인상때문인지 여러개의 사찰과 암자들을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사찰로 대원사와 수왕사가 있는데 대원사는 고려말 보덕화상의 제자였던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등 세 승려가 세웠고 조선조에는 정유재란으로 불탄 후 진묵대사가 재건해 머물렀으며 조선말에는 종교사상자인 강증산(姜甑山)이 도를 깨우친 곳으로 유명하다.
수왕사는 원래이름이 물왕이절이라 했다고 한다. 모악산 동쪽에 자리한 수왕사는 화엄종의 사찰로 장소가 협소하고 건물은 작지만 진묵대사가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수도했다는 암반에서 흐르는 석간수는 수량이 풍부하고 신선해 피부병이나 위장병 환자들이 줄을 이어 찾고 있으며 이 물로 만든 송죽 오곡주는 전북의 민속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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